[e공연리뷰] 깨어진 침묵, 고요한 파괴력…연극 '그을린 사랑'
[e공연리뷰] 깨어진 침묵, 고요한 파괴력…연극 '그을린 사랑'
  • 김은정 기자
  • 승인 2019.08.06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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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을린 사랑', 시적 언어의 힘과 탄탄한 서사구조
한 여인의 삶, 그리고 자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이야기
참혹한 진실 속 가혹한 운명을 버텨내는 한 가족
ⓒ 마크923
ⓒ 마크923

[이뉴스데일리 김은정 기자] "1+1=1이 될 수도 있어? 어떻게?"

"어느 숫자건 짝수는 2로 나누고, 홀수는 3을 곱해 1을 더해. 그렇게 끝까지 하다 보면 도달하는 것은.... 1"

약 210분의 긴 공연이 끝난 후 침묵이 찾아왔다. 배우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면서도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헛헛함은 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 7월 11일부터 올림픽공원 K-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연극 '그을린 사랑'은 '화염(Incendies)'을 원작으로 한다. 국내에서는 희곡 보다 드니 뵐니브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시적 언어의 힘, 탄탄한 서사구조가 돋보이는 극으로 한 여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엄마(나왈)가 죽었다. 쌍둥이 남매(잔느, 시몽)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왈과 친분이 있던 에르밀 르벨이 유언을 전달했지만, 남매는 답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곧 동생인 시몽의 욕설로 깨진다. 시몽은 욕을 내뱉으며 엄마를 비난한다.

엄마의 삶에 먼저 다가간 것은 누나 잔느다. 아버지에게 전할 편지와 등에 72가 새겨진 옷을 받고, 태어나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를 찾아 떠난다. 점점 진실을 찾아가면서 잔느와 연락이 어렵게 되자, 단호하게 어머니의 유언을 무시했던 시몽 또한 흔들린다.

잔느는 진실에 다가가며 침묵하게 된다. '침묵.' 참 무거운 말이다. 작품에서 시사하는 침묵의 의미는 특별했다. 침묵은 진실을 마주할 때까지 기다려준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했을 때 침묵의 고통을 깨고 함께 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 그리고 이를 침묵하지 않고 꺼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 함께 있으니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그을린 사랑'은 중동 지방 어느 한 국가의 내전을 배경으로 고아, 과부, 나그네 삶의 긴 여정을 다룬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연약한 부류에 속했던 이들이다. 주류에 속하지 못한 그들은 전쟁 속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전쟁의 이야기가 전면에 있지만, '그을린 사랑'은 이것을 과거가 아닌 현재의 목소리로 꺼내 올렸다. 적어도 피 흘리는 전쟁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도, 결국 시간을 되짚어 올라가면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신유청 연출은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다음 세대들의 상처와 그것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과제로 던지고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오늘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이어 "등장인물들의 생각 방법이 오늘 우리 삶에 더 용감한 선택을 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는 마음도 드러냈다.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에서 잔느는 엄마의 '침묵'을 마주한다. 그리고 느끼게 된다. 그동안 몰랐던, 엄마의 소리. 점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마주하는 과거는 실타래가 풀려가는 쾌감과 함께 진실의 충격을 함께 선사한다. 극 중 인물은 물론이지만, 관객 또한 사실을 알게 되는 것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나왈의 삶은 전쟁 속에 있었다. 여자로서의 인생은 제한되어 있었던 시절, 사랑하는 사람과 너무 일찍 결실을 보았다. 하지만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은 용납이 안 됐고,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나왈은 아이도 아이의 아빠도 잃었다. 나왈의 할머니는 '배울 것'을 조언하며 대물림되는 '증오'를 끊으라고 말한다.

나왈은 글을 배웠고, 자기 뜻을 펼치기 위해 숨지 않았다. 아들을 찾겠다는 뚜렷한 목표도 있었다. 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친구도 사귀게 되었고, 나름 순조로운 듯했다. 전쟁은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이 어느 때고 찾아올 수 있다. 무차별적 살인, 증오, 혐오가 만연했고, 살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어야 했다. 처음에만 어려운 사람 죽이기는 어느새 자신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어 있었다.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 나왈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는다. 성적으로 폭행과 유린당하며 아이도 낳게 된다. 살아있는 지옥에서 생존자가 된 나왈은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낸 진실 앞에 침묵하게 된다.

극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그 위에 누군가의 기억이 펼쳐지고 또 겹쳐진다. 하나씩 연결되는 선과 밝혀지는 사연은 전체를 아우르며 '침묵'에 치닫도록 이끈다. 꽤 긴 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은 진실을 찾아 몰입한다. 그 집중력이 뿜어내는 객석의 분위기와 이야기의 무게를 감당하다 보면 극 초반에 빼꼼히 보인 무대 뒤 창문이 그리워진다. 갇힌 공간, 어두운 장소. 분명 넓은 무대에 시야를 뺏는 소품도 없지만 오롯이 전해오는 극의 기운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나왈의 삶에 도달한 뒤 마주하게 된 아부 타렉의 이야기는 전쟁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도와준다. 아부 타렉의 과거 이름은 니하드다. 혼자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니하드는 스나이퍼가 된다. 다른 인생을 꿈꿨지만 전쟁이란 환경 속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받아드린 자신의 삶은 무미건조했다. 사람을 죽이고,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됐다. 어른, 아이, 성별 모두 관계없었다.

니하드는 감옥의 관리를 맡게 됐다. 아부 타렉으로 이름을 바꾸고 원하는 만큼의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했다.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악마로 기억될 전쟁의 괴물. 아부 타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왈의 삶 끝에 있었다.

먼 길을 달려온 잔느와 시몽은 자신들의 본명을 찾는다. 자나안과 사르안. 원래 이름을 찾고, 아버지와 형을 찾게 되면서 두 사람은 침묵한다. 관객도 이 순간 침묵한다. 공연장은 편지 읽는 나왈의 목소리로 가득 차고,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에 꽂히면서 흔들리는 이성을 붙잡으려 최선을 다한다. '설마'라는 생각이 '....' 침묵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아버지(아부 타렉)로서는 편지를 찢었지만, 형(니하드)으로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끌어안아 포용한 여성이자 엄마였던 나왈. 부서질듯 위태로운 진실의 방이 깨지고 그녀가 침묵한 이유가 드러나자, 모든 사람은 침묵했다. 진실을 마주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과거와 현실 앞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단단한 마음 또한 절실했다. 밝혀진 진실이 불행일지라도, 이것에 파묻혀 살지 않기 위해 그들은 싸워야만 했다.

연극평론가 안치운(호서대학교)은 '그을린 사랑'의 원작 희곡 '화염'의 시적 언어에 대해 "삶의 혼돈과 무지, 가치의 파멸과 같은 현실세계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 속 메타포들은 폭력적이고 비극적 현실에서 벗어나는 언어로의 망명"이라고 표현했다.

3시간 넘게 펼쳐지는 방대한 텍스트가 모두 기억에 남기는 힘들지만 '그을린 사랑'의 말(言) 가운데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메시지이자 생각을 시작하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도달하는 곳, 누군가를 향하는 시선과 수학적으로 표현한 관계, 독특한 장면의 전환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역할 전환의 연결 등 작품을 파고들면 들수록 복잡하지만 그만큼 와닿는 것도 풍부해진다.

K-아트홀의 특이한 구조 덕분에 창밖의 풍경을 극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는 경험은 특별했다. 마치 시간의 구조가 파괴된 느낌이랄까. 허구와 실재가 맞닿고, 외부와 내부의 시간이 같았다가 왜곡되고, 객석에서 볼 수 없던 공연장 밖, 그것도 일상의 그림이 극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각이다. 극 초반 밝았던 풍경이 극 후반에는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 되어있다는 걸 객석에서 체감하는 것은 공연장 밖에서 마주하는 그림과 확연히 다르다. 그 특별한 확장은 작품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이 작품은 '연극적' 매력이 강렬해 지난 시즌 연극평론가와 전공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올해는 공연마니아층 및 일반 관객에게도 호응을 얻으며 연극의 진수를 선사하고 있다. 

연극 '그을린 사랑'에는 배우 남명렬, 이주영, 이원석, 이세인, 송희정, 이진경, 우범진, 하준호, 백석광 등이 출연한다. 오는 8월 10일 토요일까지 올림픽공원 K-아트홀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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