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책을 담다] '환타지 없는 여행' 실제 여행기는 이것이다
[e책을 담다] '환타지 없는 여행' 실제 여행기는 이것이다
  • 윤지호 기자
  • 승인 2019.08.16 14: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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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것은 전부 환상이었다.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은 박찬일 주방장은 이렇게 말했다. “환타 1리터쯤 원샷한 기분이다. 시원하게 뻥 뚫리는데 왜 속에서 눈물이 나지?” 그가 원래부터 환타를 알고 지낸 건 아니다. 그저 환타가 언론에 쓴 글과 SNS에 올린 ‘썩개’의 팬이었을 뿐. 그런데 이 책을 보고 알았다고 한다. “가이드북이며 여행작가에 대해 내가 알던 것은 죄다 환상이었다”는 것을.

ⓒ 사계절
ⓒ 사계절

[이뉴스데일리 윤지호 기자]

직업이 여행작가인 사람이 여행에 낀 환상을 걷어차겠다고 나섰으니, 이것 말고도 밥그릇을 여러 개쯤 찬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늘 듣는 소리가 “재수 없고, 잘난 척하며, 싸가지 없다”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덩치 크고 털북숭이에 말까지 많은 아저씨가 들려주는 여행 이야기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박찬일 주방장의 말처럼 “말하자면 톡톡 쏘는데 나중에 눈물이 나는 글”이다. ‘여행환타’에서 ‘에세이환타’로 변신하겠다더니, 이름값 한번 제대로 했다. 환타 전명윤이 쓴 여행 에세이 『환타지 없는 여행』을 두고 하는 말이다.

휴가철은 물론 지쳤을 때도 여행을 가라 하고, 삶도 여행이고 매일매일이 곧 여행이라는 이야기까지, 현대인은 1년 365일 늘 여행을 꿈꾸며 산다. 그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효과는 더 대단해서 기쁨은 기본, 인문학적 통찰과 삶의 활력을 주고, 어떨 때는 영어도 가르쳐주고, 심지어 인생까지 바꿔준다고도 한다. 이른바 ‘여행 구원론’이다. “일단 떠나요! 그러면 모든 게 달라질 거예요”라는 환상이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환타지 없는 여행』은 구원을 찾아, 환상을 좇아 바깥으로 향하는 여행의 방향을 살짝 비튼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나의 제자리로 돌아올 때 그 여행은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이다. 이 책은 여행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여행에 대한 환상이 가리고 있던 또 다른 여행길로 독자를 이끈다.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환상이 한 겹씩 걷히며 여행지의 풍경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확대된다. 사는 곳이 다르고 피부색과 언어도 다르지만 결국 그와 나는 비슷한 고민을 하며 대동소이한 삶을 살고 있음을 느꼈을 때, 여행은 환타지가 아니라 진짜 현실이 되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책은 한 여행작가의 탄생기이다. 자신의 여행 취향과 여행작가라는 직업 사이의 부조화, 직업으로서의 여행에 필요한 윤리의식과 사회가 요구하는 것 사이의 갈등, 그리고 여행작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들려준다.

“요즘 누가 촌스럽게 가이드북을 들고 여행을 다니느냐”라고 말하는 시대에, 환타는 가이드북은 한 지역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종합한 리뷰집이라는 신념과 가이드북의 구매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거래여야 한다는 약속을 세운다. 그런데 이 약속을 지키기가 참 어렵다. 취재에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정보는 정확해지지만, 시대의 변화 앞에 정보가 오류가 되는 속도 또한 빨라진다. 여행지의 버스 시간이 바뀌고 음식 값이 오를 때마다 가이드북에는 ‘틀린 정보’가 쌓인다. 정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개정에 더 많은 발품을 팔아야 하는 상황.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애초에 정보를 대충 제공했으면 됐잖아”라고 속삭인다. 이와 같은 타협에 밀려 곳곳에서 공정함에 금이 가고 있으니, 이 또한 여행에 낀 짙은 환상을 걷어내야 하는 이유, 환타가 필요한 이유다.

환타는 “여행작가가 지역의 문제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으냐”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그때마다 “잘 만든 여행책은 그 지역의 시대와 현실을 여행이라는 주제로 기록한 지역서이자 민속지”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관광도 중요하지만 현실과 역사의 무게에 눈을 감지 않고, 자신이 쓴 책을 들고 낯선 여행지에 방문한 이들이 곤란에 빠지지 않도록 정확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전달하며, 그 여행길이 안전할 수 있도록 주의와 당부를 잊지 않기. 그가 세운 여행의 윤리에는 환상이 낄 자리가 없다.

또한 이 책은 아시아 곳곳의 최신 뉴스를 전해준다. 그에게 있어서 가이드북 취재는 단지 호텔, 맛집, 유명 관광지의 정보를 모으는 일이 아니다. 그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듣는 일이다. 듣고 또 듣기를 반복했더니 그곳의 삶이 깊이를 드러냈다. 텔레비전 뉴스는 인도에서 벌어진 강간 살인 사건만 보도했지만, 여행자의 뉴스는 그로 인해 일어난 인도 사회의 변화까지 알려주었다. 신문 기사는 오키나와가 장수마을이라고 알려주지만, 여행자의 뉴스는 그곳의 경제적 피폐와 위태로운 생존을 전한다. 상하이 인민광장 한쪽에 걸린 수많은 구혼자 벽보와 영화배우의 코에 현상금을 건 인도의 극우 정치인, 아시아 여행객을 뙤약볕에 줄 세우는 페닌슐라 홍콩 호텔은 여행자의 뉴스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20년간의 긴 여행을 돌고 돌아 환타가 닿은 곳은 현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이곳이다. 1999년 인도-파키스탄 국경을 넘으며 인도 측 출입국 사무소에서 파키스탄을 욕하고, 파키스탄 측 출입국 사무소에서 인도를 욕해야 했던 경험은 환타에게 “여행지에서는 그곳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한국의 텔레비전의 예능 프로에 한 인도인이 나와 동해를 일본해라고 부르면 안 되는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장면을 보며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제3세계를 여행하며 잘 알고 있다고 젠체했던 그의 환상이 깨진 순간이다.

이처럼 책에는 현실이 여행의 기억을 부르고, 다시 여행의 경험이 현실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여럿 등장한다. 그 또한 환상을 가졌다 깨트리기를 반복하며 발 닿는 곳을 넓혀 갔다. 그는 서울에서 유행하는 흑당 카페라테를 보며 오키나와에 짙게 그늘을 드리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생각했다. 또한 태풍이 닥친 제주에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펜션 주인의 말을 듣고 태풍 때문에 위험해질지도 모르니 지금 당장 섬에서 나가라고 했던 오키나와 케라마제도의 민박집 주인을 떠올렸다.

이 모든 경험을 통해 환타는 현실에는 없는 환타지를 찾아 여행을 떠난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여행은 기쁨만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아니라고. 만약 당신이 지금 여기에는 없는 유토피아를 다른 어딘가에서 발견했다고 느낀다면 그곳의 현재에 머물지 말고 더 깊이, 더 멀리 들여다보라고.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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