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한국을 담다] 경주의 찰나…'신라 속 동궁과 월지의 夜'
[e한국을 담다] 경주의 찰나…'신라 속 동궁과 월지의 夜'
  • 김연수 기자
  • 승인 2020.01.2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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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뉴스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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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뉴스데일리 김연수 기자] 경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한국 여행지 중 독특한 매력을 가진 곳이다.

경주 여행에서는 석굴암이나 첨성대 등이 대표되기도 하지만 경주 동궁과 월지의 야경은 빼놓을 수 없는 핫스팟 중에 핫스팟이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터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해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이 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 묵객들이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며, 이 곳을 기러기 ''안''자와 오리''압''자를 써서 ''안압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1980년대 '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며, 이 곳이 본래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돼 '안압지'라는 이름은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기도 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해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寶相華)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특히 밤에 바라보는 동궁과 월지의 매력은 낮과는 사뭇 다르다. 야경을 뒤로하고 환한 빛을 비추는 동궁과 월지는 한국의 아름다운 건축미에서 감동을 주는 그 순간의 찰나를 경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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